중남미 3대 문명 속으로

고대 중남미의 번성한 3대 문명이 있다.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전역에 분포된 마야 문명과 멕시코 북부 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아즈텍 문명,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을 지배한 잉카문명까지 3대 문명을 다녀온 채윤기 인턴선교사의 중남미 3대 문명 여행기를 나눠보려 한다.

[마야문명]
2012년 마야 달력과 고대 7대 불가사의 치첸이트사로 유명한 마야문명은 익투스선교센터가 위치한 멕시코 남부지방과 중앙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번성한 문명이다. 잉카 문명은 현재 페루를 중심으로, 아즈텍 문명은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번영했으나, 이와 달리 마야문명은 넓은 영토를 가지고 본인들의 세력을 키웠다. 마야문명은 중미 일대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어느 한 곳이 중심지라고 할 수 없다. 마야 문명의 전성기 때에 티칼, 코판, 빨렝케 같은 다양한 도시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도시들은 각각 권위있는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한다. 잉카제국처럼 하나의 왕가가 지역 전체를 통치하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마야 문명의 커다란 특색이다. 채윤기 인턴선교사는 고대 마야 도시 중 하나인 빨렝케에 머물며 고대 마야문명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었다.
고대 마야 문명의 거대 도시 중 하나인 빨렝케(Palenque)는 익투스선교센터에서 차로 6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빨렝케 유적지는 앞서 말한 과테말라의 티칼, 온두라스의 코판 유적과 더불어 중미 3대 마야유적지로 꼽힌다. 빨렝케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은 온통 정글로 뒤덮여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유적은 불과 250여 년 전에 스페인 선교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1960년대에 일반인들이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울창한 숲길 사이에 있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면 고대 마야 도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숲 속 한가운데 남겨진 고대 마야의 흔적들을 보니 마치 처음 이곳을 발견한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궁전과 무덤, 신전, 군사적 요충지, 거주지 등 다양한 건축물이 혼재된 이곳은 마야문명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 칭송 받는 11번 째 왕 파칼(Pakal)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여러 세대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비문 신전과 왕궁은 유적지 중 가장 눈에 띄는 2가지 건축물이다. 비문 신전은 파칼왕의 지하 묘실이 있는 곳으로 현재는 출입이 통제되어 볼 수는 없지만, 멕시코시티의 인류학박물관에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또 다른 건축물은 왕궁인데, 이곳에는 천체 관측용 4층 탑이 있다. 이는 마야인들의 놀라운 천체 관측력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마야인들은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했고 수학과 천문학을 발달시켰다. 그 중 천문학은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마야인들은 1년을 365.2420일, 달의 공전 주기를 29.53020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정확한 과학 조사로 밝혀진 365.2422일, 29.530589일, 583.92일과 비교해 거의 오차가 없다. 또 0의 개념을 발견하고 이것을 최초로 사용한 종족이다.
하지만 이런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마야인들은 9세기 이후 모두 사라졌다. 자연재해, 전염병, 식량부족, 다른 민족의 침입 등 다양한 가설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주는 근거는 없다고 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러나 광대한 범위의 영토와 눈부신 과학, 수학, 천문학 발전을 이룩한 마야 문명의 흔적을 엿보고 싶다면 멕시코 남부 지방 치아파스주에 방문해 보길 바란다. 다음으로는 거대한 피라미드로 유명한 아즈텍 문명으로 넘어간다.

[아즈텍 문명]
이제 마야문명이 사라진 9세기를 지나 아즈텍 문명을 꽃피운 13세기로 넘어가보겠다. 아즈텍 문명은 13세기에 아즈텍 족이 테노치티틀란(현재의 멕시코시티)에 정착해 도시를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후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1521년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멸망되었다. 짧은 시간에 찬란한 문명과 거대한 인구로 인근 지역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멕시코시티의 노르떼 버스터미널(Norte bus terminal)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이라는 곳에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있다. 테오티우아칸은 ‘신들이 탄생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멕시코의 고대 도시다. 기원 전 200년경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기원 후 100년경 피라미드와 같은 큰 유적들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700년경에는 도시가 파괴되었고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후 아즈텍인들이 이주해 도시를 다시 번영시켰다. 이곳에는 해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가 있다. 아즈텍 문명을 가장 대표하고 상징하는 이 피라미드들 중 해의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고 한다. 또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들은 무덤의 목적으로 지어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역할이 달랐다. 이집트 피라미드들은 꼭대기가 뾰족한 반면 아즈텍 피라미드들의 꼭대기는 뭉툭해 여러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신공양, 즉 제사와 제물을 위해 만들어진 신전이자 제단이었기 때문이다.
해의 피라미드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예상되는 달의 피라미드에서는 인신공양이 행해졌다고 한다. ‘죽은 자의 거리’라 불리는 약 2.5km 길의 끝에 달의 피라미드가 위치해 있다. 이곳 꼭대기에서 노예나 포로들의 심장을 꺼내 제사를 드렸다. 해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 다양한 크기의 피라미드와 제단들, 대규모의 주거단지로 구성되어 있는 테오티우아칸은 죽은 자의 거리를 기준으로 도시가 발달되었다. 무더운 땡볕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달의 피라미드를 향해 길을 걷다 보면 당시 제물로 인신공양을 당할 노예와 포로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멕시코 대부분의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아즈텍 문명은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멸망되었다. 스페인군과 치열한 항전을 펼친 아즈텍군이었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옮긴 천연두에 의해 아즈텍인 대부분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결국 1521년 8월 13일 아즈텍은 항복하고, 이들 지역은 점령되었다.
그 이후로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1821년 독립될 때까지 스페인의 지배는 계속 되었다. 식민지로서 혹독한 수탈과 참혹한 식민지배를 받았다. 같은 식민지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도 큰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식민지에게 자행된 수많은 아픈 역사와 차별, 그 중에서도 스페인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인종별 계급제를 시행했다. 서구에서 넘어온 백인들과, 혼혈인, 원주민, 흑인 노예, 그들의 인종에 따라 계급 서열이 결정되었다. 멕시코 독립과 함께 법률적인 계급제도는 사라졌지만, 300년 이상 지속된 식민통치를 통해 사회 계층은 고착되었고, 아직까지도 멕시코 사회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멕시코의 아픈 역사 중 하나이다.
이제 북중미인 멕시코를 떠나 남미로 향해 보겠다. 다음 문명은 마추픽추로 유명한 잉카문명이다.

[잉카문명]
멕시코 전역을 훑고 이제 남미로 넘어가본다. 세계의 모든 백팩커들이 모이는 페루다. 멕시코시티에서 5시간을 날라 페루의 수도 리마로 향한다. 또 이곳에서 4시간 버스를 타고 사막 속 오아시스의 도시 와카치나를 거쳐, 나스카문양으로 유명한 나스카, 그후 16시간 야간버스로 쿠스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잉카문명 여행이 시작된다.
잉카 제국의 행정, 정치, 군사의 중심은 지금의 쿠스코이다. 잉카제국은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했으며, 1438년 본격적으로 제국을 형성했다. 거대한 남미 대륙에는 시기, 지역별로 나스카문명, 파라카스문명 등 다양한 문명이 번성했다. 그 중 가장 크게 번영하고 넓은 지역을 다스린 문명이 잉카문명이다. 무력정복과 평화조약, 다양한 방법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넓게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콜롬비아 등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방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잉카인들이 쌓아 올린 돌벽의 석조 기술은 견고함과 정교함으로 유명하다. 돌과 돌 사이에 접착재료도 사용하지 않고 딱 맞춰 쌓아 올린 벽은 빈틈이 없다. 그간 많은 지진 피해를 받은 쿠스코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지은 건물은 다 무너진 반면 잉카인들이 지은 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페루는 쿠스코를 포함한 고산지대, 아마존 정글지대, 리마 해안지대, 와라즈 빙하, 와카치나 사막 등 다양한 기후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국가를 여행하면서도 다양한 액티비티와 자연경관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페루의 큰 장점이다. 쿠스코는 3400m, 한국 백두산의 높이를 훌쩍 넘는 수준이다. 무지개산으로 유명한 비니쿤카는 무려 5400m, 마추픽추는 2430m에 달한다. 아무런 장치도 없이 이렇게 높은 곳에 이런 위대한 석조 건물을 쌓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향하는 안데스산맥 골짜기에는 우루밤바(Urubamba)라는 강이 흐른다. 이 강을 기준으로 잉카 유적들과 인디오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성스러운 계곡이라 불리는 이 골짜기의 첫 유적은 친체로다. 이곳은 잉카제국 시절에 제사와 연회장소로 사용되고 스페인 식민시절에는 성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또 이곳에서는 리마와 알파카 등으로 만든 페루의 직물과 공예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기도 한다. 친체로를 지나 모라이로 향한다. 모라이는 잉카인들의 농업 시험장이다. 계단식 원형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각 서클마다 다른 온도를 구분해 그에 따른 농작물 재배를 연구했던 곳이다. 실제로 위쪽 서클은 더운 반면 아래쪽 서클은 서늘하고 습한 편이다. 잉카인들은 건축기술 뿐만 아니라 농업 기술에서도 큰 두각을 드러냈다. 다음 장소는 살리네라스다. 대륙판이 융기하며 안데스산맥 형성되고 이곳에 암염이 만들어져 고대 잉카인들 때부터 이곳에서 소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해발 3000m 지대에 염전이 있는 것이다. 층층이 쌓인 거대한 염전을 보면 잉카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성스러운 계곡의 마지막 유적지는 오얀따이탐보라 불리는 군사적 요충지다. 이곳에서 잉카제국 최후의 항전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 유명한 건축물은 식자재 저장고이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이 창고는 언제나 강한 바람이 안에 유입되어 선선한 온도를 유지한다. 덕분에 식자재들은 습하지 않은 환경에서 상하지 않고 오랫동안 저장된다고 한다. 이제 안데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의 마을, 아구아스칼리엔테스로 향한다.
아구아스칼리엔테스는 마추픽추의 베이스캠프 역할로 많은 여행객들이 마추픽추를 가기 전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곳이다. 이곳에서 30분 가량 버스를 타고 올라가면 드디어 마추픽추가 펼쳐진다.
마추픽추, 모든 백팩커들의 동경이기도 한 이곳은 고대 잉카 문명의 요새도시로 안데스산맥의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마추픽추는 1450여 년쯤 지어졌고, 약 1세기 후 버려졌다. 그 후 1911년 미국 탐험가 하이럼 빙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마추픽추 역시 접착 재료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그저 돌과 석재들을 쌓아 만들었다. 마추픽추가 쿠스코에서 불과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복자들은 마추픽추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덕분에 다른 잉카건축물들과 달리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만큼 험준한 산골짜기에 형성된 이 고대 도시는 그 위엄을 드러낸다. 눈덮인 산봉우리가 저멀리 반짝이고, 구름은 깎아지는 듯 한 절벽을 타고 넘어간다. 또 거대한 신전들과 주거단지들 사이로 흐르는 잉카인들의 수로 기술은 놀랍기만 하다. 지금까지도 흐르는 수로는 마추픽추의 곳곳을 따라 흘러 모든 곳에 물을 공급한다. 고대 잉카인들은 건축, 농업, 수로 등 모든 기술력에서 뛰어났다.
마추픽추를 끝으로 고대 중남미3대 문명의 여행기를 마친다.
각 문명지를 여행하며 깨달은 사실은 중남미의 역사는 타인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른 정복자들이 결정한 역사인 것이다. 뛰어난 기술력과 통치제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침략으로 인해,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된 아즈텍과 잉카문명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우리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래 기간에 걸쳐 외부의 침략을 겪고 결국 식민지배를 받아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사죄와 보상은 받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처럼, 중남미의 과거와 현재, 미래도 같은 역사를 밟아간다.  
2019년 멕시코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은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500년 전 멕시코를 침략해 식민 지배를 하며 자행한 일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스페인의 정복자였던 에르난 코르테스가 1521년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 스페인이 이후 300년간 멕시코를 지배했던 그 역사에 대한 사죄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은 단호한 사과 거부 의사를 밝혔다. 복음과 문명화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정복의 역사는 세계사 곳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과 탄압이 있었고, 역사적 상처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정복자의 시선에서 쓰인 역사와 이를 받아드리는 현재의 독자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때 식민지경험을 지닌 한 국민으로서 정의로운 가치와 올바른 역사적 관점이 무엇일까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찬란하고 거대한 고대 문명의 과거 속에서 현재의 현실과 고통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걸어가겠다고 기도 해본다.
2020/02/10
채윤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