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어느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공산권 나라이기 때문에 복음 전도가 쉽지 않아
대학을 세우면서 그 곳에 들어갔다고 했다.
병원도 세우고, 대학도 세우고, 10년간 잘 키워놓았는데,
나라가 대학과 병원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참 아쉽고 속상한 이야기이다’
한참이 지난 뒤,
나의 곱씹는 버릇은 내게 주어진 말씀이나 들은 이야기, 상황들을 가지고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객관화하기 보다는 ‘주가 왜 내게 이것을 주셨을까?’하는 주(예수)관화를 시키려고
꽤나 반복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들인다.
‘과연 이 안타까움을 하나님은 모르고 계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그 빼앗길 것을 모르고 계셨을까.
하나님은 순순히 빼앗길 수밖에 없는 분이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앗김을 허락하셨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았다.
재역할을 하기 시작한 대학과 병원을 나라에 빼앗겨서 안타깝지만,
반면, 그 땅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의 의도와 목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년간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그들을 열심히 양육시켜,
그들이 다시 그들의 조국에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이 정확히 전해지고,
그 현지인들이 건강한 예수 제자로 설 수 있도록 양육을 시킨다면,
우리가 떠난 그 대학에서, 그 병원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들이 계속해서 학생들과 환우들에게 복음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주의 사람들을 길러낼 수 있는 시간으로
10년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그들은 열정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기르고 양육했으리라.
더 함께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으리라.
이 생각들의 종착지는 ‘나’였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호흡,
현재 내가 딛고 서 있는, 내게 허락되어진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학과 병원을 짓는 일도 중요했지만 이는 선교를 위한 장치였음을,
미래 크리스천 리더를 세우고자 했던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복음을 심는 일,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웃에게 복음을 심어 건강히 뿌리내리게 하는 일
이것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작게는 내 자녀에게서부터.
때론 중요해 보이고, 급해 보이는 일을 안정화하기 위해 우린 내달리지만,
내가 주 앞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주께서 꼽으실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주께서 지금 내게,
이 장소와 이 시간을 허락하셨다면,
나를 통해 ‘복음’을 들어야 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임을.
그가 받아드리던 아니던,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사람을 정확히 알던 모르던
바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와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에게마다 ‘복음’을 전한다면,
내게 허락되어진 그 사람을 모르더라도
어느 날엔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나에게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난 그렇게 주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은혜를 그와 나누고 있지 않을까.
오늘 나와 마주한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깊이 깨닫는 요즘이다.
2019/06
<story ICHTHUS> 편집장